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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북서쪽 민통선 북방에 있는 양오리 마을은 몇 호 안되는 매우 한적한 곳이다. 그리 높지 않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에서 가장 풍광이 아름답고 수목이 우거진 곳에 미제루가 있다. 이러한 농촌의 문화경관 속에서 새로운 인자가 개입된다는 것은 자칫 그 지역의 문화적 자원들을 희생시키거나 마멸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 현대주거의 탈 역사, 탈 장소성의 문제는 세삼스러운 논제는 아니나 전국 어디서나 나타나고 있는 똑같은 형식의 왜곡된 건축언어는 오랜 시간 누적된 지역의 초기 문화를 소멸시키게 된다. 문제는「어떻게 현대 주거를 통해 원천으로 돌아가느냐?」하는 역설적 논리, 바로 그것이다. 이 지역에 새로운 주거의 탄생은 결코 진정한 공동체의식에서 출발하지 않고 우연한 접촉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접촉이 어떠한 변화를 유발시킬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건축가의 개인적 논리와 지역의 보편적 문화의 사이에는 반대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특별함이 없는 양오리 마을에서 미제루가 특별함으로 인식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과 같은 낯설지 않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현상학적으로 보았을 때 미제루는 3개의 영역이 마당을 중심으로 엇물리면서 상호 침투하는「ㅁ」자 형식을 취하되 일정한 목적을 필요로 하는 방들은 개별적 공간으로 존재하면서 고리형식으로 상호 공간을 이어주고 있다. 마치 전통가옥을 연상케 하는 이 집은 그 동안 건축가 방철린에게서 보아왔던 치밀함과 완벽함, 또는 도시적 분위기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봉정사 영선암과 같이 오히려 느슨하고 흐트러뜨려 놓은 것 같은, 그러면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그러한 느낌은 건축가가 지닌 욕망의 찌꺼기를 거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러한 작업의 변화가 이 지역만의 환경적 특성을 토대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와의 대화 중「점점 형태에 관심이 없어지고 있다」는 이 말은 건축가의 욕망이 집에 담겨지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가치관의 변화를 읽게 해주기도 하지만 형태화라는 것이 이미지가 어떤 단순한 관계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거나 제한한다는 사실을 오랜 체험을 통해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무언가 고착되고 완결됨을 거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유발시키는, 그럼으로써 이 집에 담기는 사람이 예기치 않은 사건에 직면하여 스스로 자연을 이해하고 동화되며 인간과 관계를 이루어 나아가게 하는, 흐르는 시간의 중간지점에서 삶의 흔적들이 누적되면서 느슨한 집으로 존재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치 합리주의 건축이 철저하게 인간 삶의 풍요와 자유를 유린시켰음에 반격하는 몸짓처럼 건축의 추상적 허상을 무덤 속에 매몰시겨 버리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외부공간과 접할 수 있고 출입이 가능한 미제루는 불교사상에 나오는 無始無終, 즉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순환론적 인식체계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남측 전면에 동서 방향으로 길게 구성된 누각(1칸×3칸)이 이 집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서측 마당과 거실에서 연결된 이 공간은 사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의 매체로 이웃 주민들도 쉽게 이용 할 것이다.
건축가 우경국 / 공간(SPACE) 9912 |